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문단 편집) === 본격적인 폭정의 시작 === || [[파일:external/www.redian.org/pillipin1-e1441096281567.jpg|width=100%]] || || 1970년, 학생들의 집회를 진압하는 경찰 || 하지만 마르코스가 재선에 나서는 과정에서 필리핀 정부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결국 마르코스가 재선된 직후에 필리핀은 금융위기에 처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 경제위기가 필리핀이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가 고도성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필리핀은 왜 유독 뒤쳐졌는지에 원인으로 거론된다.] 결국 마르코스는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경상수지 적자를 감축하기 위해 페소화 가치 절하를 단행할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페소화 가치하락이 물가상승으로 이어지며 마르코스의 지지율이 균열이 가기시작했고, 반대시위의 물결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결국 마르코스는 재임 2기부터 점차 독재자의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1972년 9월 23일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공산주의자]]와 파괴분자들이 국가를 위기로 내몰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의회를 해산한 후 야간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계엄령 바로 다음 날인 1972년 9월 24일 새벽까지 반정부 인사와 야당 의원, 언론인들을 포함한 총 400명이 체포되고 그들 중 100명이 구금되었다. 이후 마르코스는 군부를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만들어 군부를 이용해서 군부독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1972년부터 1976년 사이에, 마르코스는 6만 5,000명이였던 [[필리핀군]]을 4배가 넘는 27만 명으로 늘려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다. 계엄령 과정에서 이전까지 '아시아에서 제일 언론이 자유로운 나라'로 여겨지던 필리핀의 언론 자유는 이 계엄령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계엄령 직후 필리핀에서는 7곳의 TV 방송국, 27개의 전국구 신문, 66개의 지역구 신문 및 292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폐쇄된다. 공공시설도 계엄령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해 계엄령 직후 시점에는 전기 회사, 전화 회사, 항공사까지도 폐쇄되었다. 이후 일부 언론사들은 활동을 재개하기는 했지만, 모든 뉴스 매체와 출판물들은 정부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마르코스에 비판적인 외국 언론인들은 추방당하거나 비자가 거부당했다. 그리고 1973년 7월 27~28일에는 부정선거 논란 속에서 계엄령 찬성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90.67%의 찬성표를 얻었다. 계엄령 직후 마르코스는 군 장교들에게 민간인의 생사여탈권에 대한 '특별한 권한'을 부여한다. 이들은 반정부 인사들에게 날조된 혐의나 불명확한 혐의를 적용하여 체포 영장과 기소 하나 없이 집에서 끌고 가 무차별적으로 감금한 후 '[[더러운 전쟁]]' 당시 남미의 군사정권이 쓰던 것과 비슷한 수법의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알프레드 맥코이(Alfred W. McCoy, 1945~)는 1975년부터 1985년까지 필리핀에서 군대에 의한 초법적 살인으로 3,257명 정도가 사망하고 3만 5천 명이 고문피해를 입었으며 7만 명이 투옥당했다고 추정했고, 사망자들 중 2,520명은 대중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시체가 절단되거나 훼손된 후 길거리 같은 공공장소에 내버려졌으며, 심지어는 아예 시체의 머리가 [[참수]]되어 거리에 전시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마르코스의 계엄령 시기에는 약 5만여명의 사람들이 아무런 통보도 없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숙청이나 암살 등의 방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실제로 마르코스는 이런 만행들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묵인하고 심지어는 장려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마르코스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도 실시하여 자신에게 여전히 부족 사회로 본 필리핀 사회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왕이라는 이미지를 투영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마르코스는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필리핀 전역의 토착민들을 통치하는 '다투'의 이미지를 자신에 투영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사용된 필리핀의 5페소 동전에 본인의 옆모습을 새겨넣은 것은 물론이고, 마르코스는 '필리핀인 슈퍼맨' '미국에 대항한 유일한 대통령' 등으로 선전되었다. 심지어 마르코스는 하술하듯 자신의 집권 기간 동안 벤퀘트 주의 산악지역에 자신의 모습을 본뜬 거대 흉상을 세우기까지 했다. 이러한 폭정으로 인해 [[가톨릭교회]] 지도자들과 8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베니그노 아키노]]를 중심으로 한 야당 지도자들의 반대가 심화되었으며, 학생들은 대학교에서 끊임없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마르코스 정권 타도를 외쳤지만, 경찰들이 몽둥이로 시위대를 공격했고 시위대에 [[최루탄]]까지 뿌려대면서 진압했다. 한편 지방에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재자를 몰아낼 수 없다"면서 무장투쟁을 시작했는데, [[민다나오 섬]]과 [[술루 제도]]에 사는 소수민족인 [[모로인]]들과 [[마오이즘]]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중앙정부의 전복을 목표로 게릴라 활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르코스는 오히려 더욱 더 무자비한 고문과 학살, 테러로 맞서면서 게릴라들의 저항이 더욱 더 거세졌고 이로 인해 필리핀의 군대가 모두 게릴라와의 전투에 동원되는, 거의 내전에 가까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실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선포하기 전부터 수백 명의 모로인을 학살한 적이 있었지만, 계엄령 후로 모로족에 대한 탄압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필리핀군의 모로인들에 대한 학살은 매우 잔혹했는데, 실제로 마르코스가 집권할 동안 필리핀의 경찰, 육군, 일라가[* Ilagâ, 필리핀 남부에 기반을 둔 기독교 극단주의 성향의 준군사 조직. 1970년대에 모로인에 대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으며, 심지어 [[식인]]까지 저지른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는 최대 1만 명의 모로인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982년]]에는 술루 제도의 파타 섬에 필리핀군이 수개월간 포격을 가해 민간인 약 3천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학살의 계기는 어처구니없게도 1981년 2월 12일에 필리핀 육군이 모로족 반군에게 대패한 것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1983년에는 해군 함정이 민간 여객선에 발포를 하여 57명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는데, 이 '통 우마포이 학살'의 희생자 대부분은 운동 경기를 보기 위해 배를 탄 민간인들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필리핀군은 마을을 불태우기 전에는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나 마르코스 치하의 모로인 학살 중 가장 악명이 높은 학살은 [[1974년]] 9월 24일에 일어난 '팔림방 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필리핀군은 팔림방의 연안 마을인 말리스봉에서 수많은 모로인 남녀들을 체포해 모스크에 감금하고는 한 달 동안 11~60세 정도의 모로인 남성들을 매일 밖으로 끌고 가고는 자신이 묻힐 구덩이를 스스로 파게 한 후 총살한 것은 물론에 사람을 [[생매장]]하거나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등의 방식까지 동원해가며 죽였는데, 이렇게 학살당한 남성이 무려 1,500여명에 달한다. 게다가 9~60세 정도의 여성 3천여명은 심문을 명목으로 최소 10명의 그룹으로 짜여진 후 해안에 정박한 해군 함정에 끌려가 군인들에게 폭행과 강간을 당했으며, 이에 저항하는 여성이 있으면 그 즉시 총살했고, 열사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어린이가 있으면 그 시체를 바다에 유기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 학살에 가담한 필리핀의 군인들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여성에게 남편과의 성관계를 강요하거나 심지어는 모스크 안에서도 여자를 강간하면서 그 광경을 그녀의 가족들로 하여금 강제로 지켜보게 했다.] 이렇게 연행된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대부분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계속 이 학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며, 필리핀군은 덤으로 이 마을의 가옥 300여채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이후 2014년 9월에 [[베니그노 아키노 3세]] 정부는 이 학살 피해자들을 '계엄령 피해자'로 공식 인정했다. 결국 이런 악행들 때문에 마르코스는 1975년 3월에 미국의 외교 전문가들이 꼽은 세계 최악의 지도자 6위에 등극하게 되는데, 참고로 이 조사에서 마르코스 바로 밑인 7위를 차지한 지도자가 다름아닌 '''[[김일성]]'''이었단 것을 감안하면, 마르코스의 폭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5031700209203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7&officeId=00020&pageNo=3&printNo=16448&publishType=00020|참고자료]] 이에 여론이 악화되자 마르코스는 1981년 1월 17일에 8년간이나 지속된 계엄령을 해제했지만, 계엄령을 해제했다고 해서 마르코스의 독재가 완화되거나 민주화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적 이유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계엄령이 시행될 때보다 더 늘었으며, 덤으로 마르코스는 헌법을 개정하여 임기 6년의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1981년 6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공갈, 협박, 매수를 이용한 부정한 방법을 한 끝에 선거에서 88% 이상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3번째로 [[대통령]]이 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르코스는 집권 말기에 국제 사회와 가톨릭 교회의 압력으로 마르코스는 자신을 비판하는 일부 신문의 발행을 허용했지만, 그대로 신문을 폐쇄할 수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정권의 핵심이 되기 시작했다. 1954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결혼한 이멜다는 미인대회 우승자로, 굉장히 사치스럽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멜다는 1972년의 계엄령 선포 이후에는 [[필리핀]]의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었는데, 그녀는 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정부와 산업체의 요직에 친척들을 임명해서 비난을 샀으며, 그녀 자신도 수도 [[마닐라]] 시장직(1975년~1986년)과 주거환경장관직(1979년~1986년)을 역임했다. 또한 마르코스는 자신의 친척이나 아들 딸들을 각각 자신의 핵심 요직에 앉혀서 측근 정치를 실시했고, 결국 측근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이후 상황은 안 봐도 개판 그 자체인데, 마르코스의 부정부패, 막장 경제정책과 이멜다 마르코스의 사치로 인한 국가 재정의 파탄, 외채 상승, 그리고 상승하는 실업률과 빈부격차가 발생하며 경제가 점차 막장이 되어갔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계엄령 기간 동안 마르코스 정권이 외채 이자가 낮은것을 이용하여 외채를 많이 빌렸는데 초기에는 코코넛 등 원자재 가격상승으로 경제성장이 재개되었지만, 1970년대 말에 외채위기에 직면하면서 이것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르코스 정권 당시 목재 제품은 필리핀 최고의 수출상품이었는데, 마르코스 정권 당시에 나무가 얼마나 많이 벌목되었냐면 1980년대에는 필리핀 나무가 한동안 고갈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천 개의 섬들로 이뤄진 국가 특성상 전국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빈번히 일어났다. 특히 필리핀 공산당 산하 신인민군(NPA) 및 모로족(수니파 무슬림 집단) 독립운동단체 '모로민족해방전선(MNLF)'과 각각 내전을 치르느라 군대가 총동원되어 온 나라가 전시체제나 다름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